하나님께서 호세아에게 명령하십니다. “너는 또 가서 타인에게 연애를 받아 음부 된 그 여인을 사랑하라”(호3:1). ‘그 여인’이 누구입니까? 바로 고멜입니다. 하나님께서 고멜이라고 부르지 않고 아내라는 말도 쓰지 않고 ‘그 여인’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호세아와 고멜이 서로 상관할 필요가 없는 완전한 남남임을 보여 주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타인에게 연애를 받아 음부 된 그 여인을 사랑하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지금 고멜의 상태가 어떠할까요? 호세아와 결혼하고도 계속 다른 남자와 눈이 맞아 외도를 일삼았습니다. 첫아이는 호세아의 아이였지만 그 이후에 낳은 아이들은 누구의 자식인 줄도 모를 만큼 문란한 삶을 살던 여자가 바로 고멜입니다. 결국 고멜은 남편과 자녀들을 버리고 가출을 합니다.
자기 인생을 자유롭게 살려고 나갔지만 겨우 몸을 파는 창녀 생활을 하게 됩니다. 처음에는 많은 남자가 자기를 따르고 사랑해 주었지만 여자로서 아름다움이 사라지고 늙어 가면서 몸을 파는 창녀로서 가치도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니 누가 고멜을 좋아하겠습니까? 이내 버림받게 되었습니다. 고멜을 고용한 포주 입장에서도 이제 더는 사용 가치가 없어서 고멜을 노예로 팔려고 내놓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고멜을 하나님께서 “다시 사랑하라”라고 말씀하십니다. 호세아 1장 2절에서는 하나님께서 호세아에게 고멜과 결혼하여 아내로 취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 여인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호세아가 고멜을 처음 데려왔을 때는 이 정도 상황은 아니었습니다. 원래부터 고멜의 품행이 단정치 못했으나, 지금처럼 회복 불가능한 상황은 아니었습니다. 그나마 가정을 이루어 살다 보면 좋아질 것이라는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당시 선지자 호세아에게는 그런 여자와 결혼하라고 한 것도 어려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창녀 생활을 하다가 쓸모없어 노예로 팔려 갈 고멜을 데려와 살라는 것을 넘어 음부 된 그 여인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결혼하라는 명령은 하나님 말씀이니까 억지로라도 순종할 수 있습니다. 결혼식을 올릴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여인을 사랑하는 것은 전혀 다른 상황입니다. 사랑은 억지로 되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정략적으로 결혼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결혼하더라도 그 여자를 진정으로 사랑하기란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아 버림받은 고멜, 그 여인을 사랑하라고 하니 호세아에게는 처음 결혼하라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입니다. 또 하나님 앞에 할 말도 있지 않겠습니까? “하나님, 제가 그래도 하나님 말씀에 순종해서 고멜과 결혼까지 했고 자식까지 낳고 살아왔는데 그 정도만 해도 대단한 것 아닙니까? 처자식을 버리고 집 나간 그 여자를 다시 사랑하라고요?” 보통 사람 같으면 받아들이겠습니까? 절대 못 받아들일 일입니다. 그러나 호세아는 또 다시 하나님의 명령에 묵묵히 순종합니다. <계속>
/장항진 목사(동탄연세중앙교회)
위 글은 교회신문 <830호> 기사입니다.